– 변방으로의 초대 –
제 14회 서울변방연극제
장애인극단판 + 류세이오 류
변방(邊方)
1 .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가장자리 지역
2 나라의 경계가 되는 변두리의 땅
이상은 ‘변방’이란 단어의 사전적 정의다. 한 단어의 정의에는, 그것이 가진 언어적 의미가 정리되어 있기에 그 자체로는 어떤 정치성도 없는, 다시 말해 ‘중립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변방’을 정의하기 위해 사용된 몇 가지 단어들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중심지, 가장자리, 경계, 그리고 변두리.
이제 이 단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어디가 중심이고 어디가 변방인가’. ‘누구에 의해 정해진 중심인가’. ‘그리고 중심과 변방을 가르는 기준선은 무슨 기준으로 그어졌는가. 정치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파워 게임이자 힘의 분배임을 생각해볼 때, 힘이 집결된 ‘중심’과 그로부터 소외된 ‘변방’이란 개념이야말로 정치의 본질과 가장 맞닿아 있으며, 그렇기에 의미만으로도 가장 ‘정치적’인 단어들일지 모른다.
2012년 7월, 제 14회 서울변방연극제가 ‘연극 없는 연극, 정치 없는 정치’라는 주제를 들고 ‘중심지’ 서울에서 ‘변방’을 자처하는 아이러니를 들고 관객들을 찾아왔다. 새로운 무대미학을 추구하며 1999년 봄, ‘젊은 연출가들의 속셈전’으로 시작한 서울변방연극제는 올해도 변함없이 연극과 정치, 연극과 사회의 관계와 이슈들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이번 연극제에 참여하는 14편의 테마를 보면, 주거 공간과 재건축 (‘움직이는 집‘, ’기이한 마을버스 여행-성북동’, ‘뉴홈’ 등), 국가 정체성 (‘인터뷰 프로젝트 연작 시리즈’, ‘늙은 코미디언의 창고), 디아스포라 (‘미래 이야기’), 그리고 장애 (‘공상의 뇌 2012’) 등 어느 하나 정치적이지 않은 테마가 없고, 또 어느 하나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은 담론들이 없다. 다양한 장르적 실험과 시도를 통해, ‘변방’에 위치된 여러 주제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더 나아가 새로운 제안과 가능성을 탐색하는 서울변방연극제가 그 역동적인 ‘변방’의 현장으로 올 여름 당신을 초대한다.
변방으로의 초대 하나
– 변방: 공업단지와 예술이 경계 없이 어우러진 공간
7월 11일, 이번 서울변방연극제에 상연되는 14편의 공연/전시 중 ‘공상의 뇌 2012’를 선택하게 된 동기는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개인 스케줄에 맞춰 공연을 고르다 보니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공연이 바로 ‘공상의 뇌 2012’ 이었기 때문이다.
평소 공연을 보기 전, 관련 정보를 이것저것 찾아보고 가는 편인데 이번 공연만큼은 개인 사정상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정보가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무작정 공연장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종착역은 1호선 ‘영등포역’. 별다른 생각 없이 지하철에 몸을 맡긴 채 가던 중, 문득 동행한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근데, 공연장 대학로라고 하지 않았어?”
문득 머릿속에 번뜩이는 무언가가 희미하게 지나감을 느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서울변방연극제의 공연은 대부분 대학로 일대에서 열린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공연 ‘공상의 뇌 2012’는 대학로에서 한참 떨어진, 게다가 공연장소로는 생소한 ‘문래’에서 열리는 것일까.

▲ 영등포역 근처에 즐비한 철강공업단지
안내도를 따라 영등포역 6번 출구를 나온 후, 목적지 ‘문래예술공장’로 향하는 길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더욱 더 생소하기만 했다. 문래역 사거리까지 이어지는 도로엔 문화 시설이 아닌 철강공장들이 즐비해있었고, 저녁 공기는 작업 중인 절단기가 내는 날카로운 소리들과 메케한 화약약품 냄새로 채워져 있었다. 흔히 공연을 보러간다고 할 때 혜화역 전철역에서 마로니에 공원으로 이어지는 풍경을 습관적으로 상상한 나로서는 나름의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찾아간 공연장 ‘문래예술공장’ 역시 철강 공업단지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었고, 공연장 바로 옆 공장에서는 쉴 새 없이 공정 작업 소리가 들려왔다.

▲ 공업단지 바로 앞에서 펄럭이는 문래예술공장(공연장) 깃발
공연장에 들어가기 전, 문득 잠시 입구에 서서 공연장과 그 주위 풍경을 돌아보았다. 잠시 시간을 두고 생소함과 낯섦이 주는 불편함에 익숙해지자, 내 안을 채우는 신선한 즐거움과 흥분을 느낄 수 있었다. 예술과는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삭막한 공업 단지 한 가운데 ‘문래예술공장’이라는 아름답고 실험적인 예술 공연장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어쩌면 공연과 예술의 메카 ‘대학로’가 아닌, 이곳 철강 공업단지야 말로, ‘변방연극제’라는 타이틀에 가장 적합한 공연장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난 공연 자체를 즐기기도 전에, 공연장의 ‘변방적 위치’가 주는 의미와 즐거움에, 그리고 그 오묘한 조화에 취해 공연장 입구로 들어갈 수 있었다.
변방으로의 초대 둘
– 변방: 장애/비장애의 구분이 사라지고 제 3의 몸짓이 제시되는 공간
요약하자면 는 인간의 두뇌 속에서 벌어지는 작용들을 무용적 동작들로 엮어낸 한 편의 무용극이다. 우리나라 ‘장애인극단판’과 일본 안무가이자 연출가인 ‘류세이오 류’가 함께 만든 이번 에서는 장애예술, 혹은 장애예술가라는 범주에 갇히길 거부하는 그들의 새롭고 독특한 예술적 몸짓들이 시도되고 있다. ‘공백’, ‘침묵’, ‘인간과 동물의 결합’, ‘뇌’, ‘두뇌 중심의 활동’이라는 5가지 장으로 구성된 이 무용극에서는 한 시간 반 동안 6명의 지체 장애인 무용수들과 비장애인 무용수들이 함께 무대를 채워 나가고 있었다.
공연의 대부분은, 지체 장애인 무용수들은 휠체어를 타고 나와 그들의 몸짓을 억지로 꾸미거나 다듬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관객들에게 제시하고, 이 몸짓들에 비장애인 무용수들이 자연스럽게 따라 참여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실 일상에서 보통의 사람들이 지체 장애인들이 몸짓들을 지켜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의도치 않게 당사자들에게 폭력적인 시선을 가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일상에서 보통 사람들이 그들의 몸짓을 따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무대에서 표현되는 지체 장애인들의 몸짓들은, 장애를 가졌기에 만들어내는 불편한 몸짓이 아닌, 무대 공간을 채우는 하나의 자연스러운 ‘안무’로서 제시된다. 그리고 장애인 무용수들과 유사하게 움직이는 비장애인 무용수들의 몸짓 역시, 불편함의 ‘모방’이 아닌 하나의 큰 그림에 ‘참여’하는 몸짓일 뿐이다. 그리하여 바로 이 순간, 이 공간에서 장애인 무용수들의 몸짓과 비장애인 무용수들의 몸짓은 더 이상 구별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제 3의 몸짓, 하나의 ‘안무’만이 있을 뿐이다.
4장 ‘뇌’ 부분에서 극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공중에 설치되어 있던 여러 조형물 사이로 휠체어가 서서히 달려 내려오며 등장한다. 그러나 그 휠체어는 장애만을 상징하거나, 그에 관한 어떤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공격적인 조형물이 결코 아니다. 원래 설치되어 있던 다른 조형물들과 함께 전체 무대 장치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조형물로서만 기능할 뿐이다.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휠체어는, 무용수들의 몸짓이 그러했듯이, 기존의 조형물들과 함께 어우러져 새로운 제 3의 무대공간을 창출한다.

▲ 무대 천장에 달린 조형물들.
이 사이로 휠체어가 서서히 내려온다.
어쩌면 지체 장애인 무용수들의 몸이 일반인과는 ‘다르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그들의 몸짓들은 지금 우리의 현실에선 오늘처럼 ‘변방의 무대’에 올려질 수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변방에 무대에서 그들의 몸짓이 만들어낸 메시지는, 일반인들의 몸짓과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새롭게 만들어진 제 3의 몸짓이라는 것이었다. 바로 이 메시지가 무대 공간을 가득 채웠을 때, 우리는 ‘중심’과 ‘변방’의 구분이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그리고 그들의 몸짓이 제 3의 몸짓으로 인정될 때 얼마든지 ‘중심 무대’에 오를 수 있는 몸짓임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변방의 무대이기에 시도될 수 있는 다양한 작품들과 프로그램들이 가득한 ‘서울변방연극제’. 여기서 잠시 ‘중심’과 ‘변방’을 구분 짓는 것이, 어떤 절대적인 기준에 의해서가 아닌 힘의 이동에 의한 것뿐임을 상기해보자. 그렇다면 지금 이 곳 ‘서울변방연극제’에서 던져지고 있는 다양한 화두들이, 언젠가 우리 사회 ‘정 중앙’에서 제시될 수 있다는 희망을 조심스럽게 품어보는 것은 그리 허황된 꿈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위 글은 LIG 아트홀 컬처리포터 ‘박나영’님의 글입니다.
LIG 아트홀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님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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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방으로의 초대 –
제 14회 서울변방연극제
장애인극단판 + 류세이오 류
변방(邊方)
1 .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가장자리 지역
2 나라의 경계가 되는 변두리의 땅
이상은 ‘변방’이란 단어의 사전적 정의다. 한 단어의 정의에는, 그것이 가진 언어적 의미가 정리되어 있기에 그 자체로는 어떤 정치성도 없는, 다시 말해 ‘중립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변방’을 정의하기 위해 사용된 몇 가지 단어들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중심지, 가장자리, 경계, 그리고 변두리.
이제 이 단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어디가 중심이고 어디가 변방인가’. ‘누구에 의해 정해진 중심인가’. ‘그리고 중심과 변방을 가르는 기준선은 무슨 기준으로 그어졌는가. 정치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파워 게임이자 힘의 분배임을 생각해볼 때, 힘이 집결된 ‘중심’과 그로부터 소외된 ‘변방’이란 개념이야말로 정치의 본질과 가장 맞닿아 있으며, 그렇기에 의미만으로도 가장 ‘정치적’인 단어들일지 모른다.
2012년 7월, 제 14회 서울변방연극제가 ‘연극 없는 연극, 정치 없는 정치’라는 주제를 들고 ‘중심지’ 서울에서 ‘변방’을 자처하는 아이러니를 들고 관객들을 찾아왔다. 새로운 무대미학을 추구하며 1999년 봄, ‘젊은 연출가들의 속셈전’으로 시작한 서울변방연극제는 올해도 변함없이 연극과 정치, 연극과 사회의 관계와 이슈들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이번 연극제에 참여하는 14편의 테마를 보면, 주거 공간과 재건축 (‘움직이는 집‘, ’기이한 마을버스 여행-성북동’, ‘뉴홈’ 등), 국가 정체성 (‘인터뷰 프로젝트 연작 시리즈’, ‘늙은 코미디언의 창고), 디아스포라 (‘미래 이야기’), 그리고 장애 (‘공상의 뇌 2012’) 등 어느 하나 정치적이지 않은 테마가 없고, 또 어느 하나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은 담론들이 없다. 다양한 장르적 실험과 시도를 통해, ‘변방’에 위치된 여러 주제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더 나아가 새로운 제안과 가능성을 탐색하는 서울변방연극제가 그 역동적인 ‘변방’의 현장으로 올 여름 당신을 초대한다.
변방으로의 초대 하나
– 변방: 공업단지와 예술이 경계 없이 어우러진 공간
7월 11일, 이번 서울변방연극제에 상연되는 14편의 공연/전시 중 ‘공상의 뇌 2012’를 선택하게 된 동기는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개인 스케줄에 맞춰 공연을 고르다 보니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공연이 바로 ‘공상의 뇌 2012’ 이었기 때문이다.
평소 공연을 보기 전, 관련 정보를 이것저것 찾아보고 가는 편인데 이번 공연만큼은 개인 사정상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정보가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무작정 공연장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종착역은 1호선 ‘영등포역’. 별다른 생각 없이 지하철에 몸을 맡긴 채 가던 중, 문득 동행한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근데, 공연장 대학로라고 하지 않았어?”
문득 머릿속에 번뜩이는 무언가가 희미하게 지나감을 느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서울변방연극제의 공연은 대부분 대학로 일대에서 열린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공연 ‘공상의 뇌 2012’는 대학로에서 한참 떨어진, 게다가 공연장소로는 생소한 ‘문래’에서 열리는 것일까.
▲ 영등포역 근처에 즐비한 철강공업단지
안내도를 따라 영등포역 6번 출구를 나온 후, 목적지 ‘문래예술공장’로 향하는 길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더욱 더 생소하기만 했다. 문래역 사거리까지 이어지는 도로엔 문화 시설이 아닌 철강공장들이 즐비해있었고, 저녁 공기는 작업 중인 절단기가 내는 날카로운 소리들과 메케한 화약약품 냄새로 채워져 있었다. 흔히 공연을 보러간다고 할 때 혜화역 전철역에서 마로니에 공원으로 이어지는 풍경을 습관적으로 상상한 나로서는 나름의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찾아간 공연장 ‘문래예술공장’ 역시 철강 공업단지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었고, 공연장 바로 옆 공장에서는 쉴 새 없이 공정 작업 소리가 들려왔다.
▲ 공업단지 바로 앞에서 펄럭이는 문래예술공장(공연장) 깃발
공연장에 들어가기 전, 문득 잠시 입구에 서서 공연장과 그 주위 풍경을 돌아보았다. 잠시 시간을 두고 생소함과 낯섦이 주는 불편함에 익숙해지자, 내 안을 채우는 신선한 즐거움과 흥분을 느낄 수 있었다. 예술과는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삭막한 공업 단지 한 가운데 ‘문래예술공장’이라는 아름답고 실험적인 예술 공연장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어쩌면 공연과 예술의 메카 ‘대학로’가 아닌, 이곳 철강 공업단지야 말로, ‘변방연극제’라는 타이틀에 가장 적합한 공연장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난 공연 자체를 즐기기도 전에, 공연장의 ‘변방적 위치’가 주는 의미와 즐거움에, 그리고 그 오묘한 조화에 취해 공연장 입구로 들어갈 수 있었다.
변방으로의 초대 둘
– 변방: 장애/비장애의 구분이 사라지고 제 3의 몸짓이 제시되는 공간
요약하자면 는 인간의 두뇌 속에서 벌어지는 작용들을 무용적 동작들로 엮어낸 한 편의 무용극이다. 우리나라 ‘장애인극단판’과 일본 안무가이자 연출가인 ‘류세이오 류’가 함께 만든 이번 에서는 장애예술, 혹은 장애예술가라는 범주에 갇히길 거부하는 그들의 새롭고 독특한 예술적 몸짓들이 시도되고 있다. ‘공백’, ‘침묵’, ‘인간과 동물의 결합’, ‘뇌’, ‘두뇌 중심의 활동’이라는 5가지 장으로 구성된 이 무용극에서는 한 시간 반 동안 6명의 지체 장애인 무용수들과 비장애인 무용수들이 함께 무대를 채워 나가고 있었다.
공연의 대부분은, 지체 장애인 무용수들은 휠체어를 타고 나와 그들의 몸짓을 억지로 꾸미거나 다듬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관객들에게 제시하고, 이 몸짓들에 비장애인 무용수들이 자연스럽게 따라 참여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실 일상에서 보통의 사람들이 지체 장애인들이 몸짓들을 지켜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의도치 않게 당사자들에게 폭력적인 시선을 가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일상에서 보통 사람들이 그들의 몸짓을 따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무대에서 표현되는 지체 장애인들의 몸짓들은, 장애를 가졌기에 만들어내는 불편한 몸짓이 아닌, 무대 공간을 채우는 하나의 자연스러운 ‘안무’로서 제시된다. 그리고 장애인 무용수들과 유사하게 움직이는 비장애인 무용수들의 몸짓 역시, 불편함의 ‘모방’이 아닌 하나의 큰 그림에 ‘참여’하는 몸짓일 뿐이다. 그리하여 바로 이 순간, 이 공간에서 장애인 무용수들의 몸짓과 비장애인 무용수들의 몸짓은 더 이상 구별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제 3의 몸짓, 하나의 ‘안무’만이 있을 뿐이다.
4장 ‘뇌’ 부분에서 극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공중에 설치되어 있던 여러 조형물 사이로 휠체어가 서서히 달려 내려오며 등장한다. 그러나 그 휠체어는 장애만을 상징하거나, 그에 관한 어떤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공격적인 조형물이 결코 아니다. 원래 설치되어 있던 다른 조형물들과 함께 전체 무대 장치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조형물로서만 기능할 뿐이다.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휠체어는, 무용수들의 몸짓이 그러했듯이, 기존의 조형물들과 함께 어우러져 새로운 제 3의 무대공간을 창출한다.
▲ 무대 천장에 달린 조형물들.
이 사이로 휠체어가 서서히 내려온다.
어쩌면 지체 장애인 무용수들의 몸이 일반인과는 ‘다르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그들의 몸짓들은 지금 우리의 현실에선 오늘처럼 ‘변방의 무대’에 올려질 수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변방에 무대에서 그들의 몸짓이 만들어낸 메시지는, 일반인들의 몸짓과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새롭게 만들어진 제 3의 몸짓이라는 것이었다. 바로 이 메시지가 무대 공간을 가득 채웠을 때, 우리는 ‘중심’과 ‘변방’의 구분이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그리고 그들의 몸짓이 제 3의 몸짓으로 인정될 때 얼마든지 ‘중심 무대’에 오를 수 있는 몸짓임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변방의 무대이기에 시도될 수 있는 다양한 작품들과 프로그램들이 가득한 ‘서울변방연극제’. 여기서 잠시 ‘중심’과 ‘변방’을 구분 짓는 것이, 어떤 절대적인 기준에 의해서가 아닌 힘의 이동에 의한 것뿐임을 상기해보자. 그렇다면 지금 이 곳 ‘서울변방연극제’에서 던져지고 있는 다양한 화두들이, 언젠가 우리 사회 ‘정 중앙’에서 제시될 수 있다는 희망을 조심스럽게 품어보는 것은 그리 허황된 꿈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위 글은 LIG 아트홀 컬처리포터 ‘박나영’님의 글입니다.
LIG 아트홀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님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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